연기법과 방하착
1.
연기법의 생활실천
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 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연기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첫째가 인과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 좀 얻어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 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 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3.
둘째로 연기를 믿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삶, 그리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톨에 담긴 일체 법계의 은혜를 명상해 보셨나요?
농부의 은혜, 농부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또 그 부모님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속의 모든 조상, 존재의 무한한 은혜, 곡괭이의 은혜, 비료의 은혜,
비료 공장 모든 인부들의 은혜 토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비와 바람의 은혜 그렇게 시작되어
무량한 공간을 향기롭게 감싸고 있는 이 모든 무한한 은혜,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4.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5.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여 생하고 멸하는 것 또한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生),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死)일 뿐입니다.
6.
고집을 버리면 다 옳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 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
7.
주관이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철저한 객관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순수한 '내 생각'은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길들여진 내 생각' 이었음을 봅니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내 생각이었음을, 지독한 고정관념의 연장이었음을.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고정된 틀 그 수많은 고정관념들을 뭉뚱그려 '내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주관이라 그럽니다.
8.
내 생각을 고집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린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면 세상이 고요합니다. 주위가 평온해 집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처럼, 우물에서 뛰쳐나온 개구리처럼, 그렇게 세상을 보는 기준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뻥 뚫려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이미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음을 볼 것입니다.
9.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100% 옳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
상황 따라, 인연 따라 옳은 것일 뿐입니다.
어차피 바꾸지 못할 바에는 빨리 내 고집을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빨리 방하착 해야 합니다. 턱! 하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보면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10.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자료출처 : 목탁소리(http://www.moktakso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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