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道 란 ? 2.

qhrwk 2024. 10. 13. 10:39

 

♣道 란 ? 2.♣

 

과거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도이 생사문제(生死問題) 때문에출가(出家)하여,생사의 탈출구(脫出口)를 
구하러 사방에찾으러 다니다가, 그것이 헛된 짓이며생사의 요인(要因)이마음에 있는 것을 알고마음을 깨달아 해결(解決)한 것이다.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많은 생각 속에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생각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끊임없이기멸(起滅)하고 있으나,생각 아닌 마음은 한번도 난(生) 일도,없어진(滅) 일도, 달라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생사(生死)란 무엇인가 ? 마음속의 생각이다.난 줄로 알고, 죽은 줄로 알고,온 줄로 알고, 간 줄로 알고 있는 생각이다.생각은 환상(幻想)이니생사거래(生死去來)란실체(實體)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 하나를 미(迷)하여무변(無邊)의 번뇌(煩惱)를 일으킨 사람을중생(衆生)이라 하고,마음 하나를 깨달아
무변의 묘용(妙用)을 일으킨 사람을제불(諸佛)이라 한다.

미(迷)하면 번뇌가 되고,깨달으면 묘용이 된다는 말이다.미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요,깨달으면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마음을 미(迷)했다는 것은,마음속에 생각(相)이 가려서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마음속의 생각을 놓아 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한 원인(原因)은마음속에 생각(相)이 가려서이니,생각을 놓아 버리면바로 생각 아닌 마음이 된다.생각 아닌 곳에능히 감각(感覺)할 줄 아는영지(靈知)가 뚜렷하다.이 영지(靈知)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기요,생사(生死)와 상관없는영원(永遠)의 안식처(安息處)인 것이다.
염원(念願)하고 있던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마음을사람마다 갖추어 있고,내지(乃至) 미물곤충(微物昆蟲)에 이르기까지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갖추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생(衆生)은마음속에 망상집착(妄想緝着)이란구름이 가려서, 이 좋은 보배를 보지 못하고
환(幻)과 같은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여신음(呻吟)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부처님이중생의 마음속에 가리고 있는 구름을 덜어 주기 위해법(法)을 설(說)하여,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마음에 돌아가게 한 것이 중생제도(衆生濟度)이다.

중생제도(衆生濟度)를 한다고 해서부처님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은 아니다.만일 부처님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한다고 하면과거에 부처님이 한량(限量)없었다는데왜 우리를 제도(濟度)하지 않았는가 ?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우리 마음속의 지혜(智慧)를 열어미운(迷雲)을 타파(打破)하여,자기(自己)가 자기를 제도(濟度)하는 것이다.부처님은 병(病)을 잘 아는 의사(醫師)와 같아서 병이 낫도록환자(患者)에게 약(藥)을 주었는데도 
환자 자신이 약을 안 먹고 병을 낫으지 못하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원래(元來) 갖추어져 있는 본심은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 아무런 꾸밈이 없고,거짓이 없는 
천진(天眞)이다.이 본심(本心)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말로서 알려 하고사량분별(思量分別)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고 하면,마치 둥근 구멍에네모진 기둥을 
맞추려는 것과 같아서 맞지 않는다.둥근 구멍에는 둥근 기둥이라야 맞는 것이다.

일체 사량(思量:생각)이 끊어진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를사량분별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무리(無理)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놓아야 비로소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에 계합(契合)될 것이다.
비사량(非思量)이라 하니아무 생각도 일으킬 수 없는목석(木石)같이 생각하여멍하게 있어서도 안된다.
사량(思量)이 아닌 곳에 뚜렷이 영지(靈知)가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기에공적(空寂)이라 하고 목석과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했다.
깨달은 사람은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었기에마음이 고요(空寂)하고 동시에영지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원만(圓滿)하다.
그러나 미(迷)한 사람은마음속에 망상분별(妄想分別)을쉬지 못했기에마음이 어지럽고(散亂) 동시에 혼매(昏昧)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공적과 영지가 둘 다 결(缺)한 것이다.

공적과 영지라 하지만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마음 자체(自體)가 공적하면서 영지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본심(本心)을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우리의 생활(生活)에 공기(空氣)는 일분(一分), 일초(一秒)도 여의고는 살 수 없는 소중(所重)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는 바람에공기의 존재(存在)를
모르고 있듯이,우리의 본심도 어느 장소(一切處)나,어느 시간 일체시(一切時)에도,또 기둥시계(時計)의 일초, 일초, 
초(秒)를새기는 추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크기가 같지만,낮에는 잘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낮에는 환경(環境)의 소음(騷音)에 가려서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밤에는 낮보다도 소음이 적고조용하기 때문에잘 들리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에는 차이(差異)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쉬면본심(本心)을 본다고 했는데,생각을 쉰다는 건마음속에 가지고 있는(執着) 생각을
놓는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그것이 마음속을 가로막아마음이 막힌 것이니,마음을 막았던 생각을 놓으면
막힌 것이 없어지니 마음은 저절로 열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아무 탈 없는 가슴속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고
스스로 답답하고 불안(不安)해 하는 것과 같다.

불안의 원인이 돌멩이 때문이니돌멩이만 덜어내면 원래(元來) 탈 없던 가슴이라,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저절로 없어지고 만다.마음속에 집착(執着)하고 있던 생각을 놓은 자리에드러난 본심(本心)은모든 망념(妄念)을 여의었기 때문에
지극(至極)히 고요(空寂)하고,망념의 구름이 덜어졌으니지극히 신령(靈知)하다.
그렇다면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본심(本心)이 망념(妄念)이없을 때만 있고,망념이 있을 때는 없는 건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망념이야 있든, 없든, 관계(關係)없이 조금도변(變)함이 없고 항구불멸(恒久不滅) 하지만다만 망념이 있을 땐, 망념에 가려서나타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중천(中天)에 떠 있는 해가 구름이 가리든,가리지 않든, 변(變)함이 없으나구름이 가리면 해를 볼 수 없고,
병(甁) 속에 있는 등(燈)불도불빛에는 변함이 없으나병 속에 갇혀 있으면 불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망념(妄念), 망념(妄念)하지만망념이란 자세(仔細)히 관찰(觀察)해 보면실제(實際) 있는 실물(實物)이 아니다.
그것이 실(實)로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은착각(錯覺) 때문이다.착각은 관찰부족(觀察不足)에서 온 것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실제 있는 것은 아닌데,만일 실물(實物)로 본다면 착각이요,잘 살펴보지 못한 데서 착각했다고 하겠다.

망념도 마찬가지다.모양도 없는 마음속에 망념의 그림자(映像)가 비치고 있는 것 뿐이니,이 망념의 정체(正體)를 
포착(捕捉)하려고가만히 망념 속을 들여다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목전(目前)에산(山)이 있으면 산(山)인 줄 알고,물이 있으면 물인 줄 아는영지(靈知)가 뚜렷하지 않는가 !이 영지(靈知)가 바로 자기(自己)의 본심(本心)이다.
이 본심(本心)은 공적(空寂)하여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고,영지(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본심(本心)은 일체(一切) 모든 생각의 근원(根源)이요,일체선악(一切善惡) 만법(萬法)을 갖추어 있고생사(生死)의 
시발점(始發點)이며 종점(終點)인 것이다. 이 본심(本心)은 공적(空寂)하여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고,
영지(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본심(本心)은 일체(一切) 모든 생각의 근원(根源)이요,일체선악(一切善惡) 만법(萬法)을 갖추어 있고생사(生死)의 
시발점(始發點)이며 종점(終點)인 것이다.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이 사과를 보는데 눈에 눈병(病)이 없고,그 밖에 장애물(障碍物)이 없는 한(限),
만(萬) 사람이 보면 만 사람이 똑같이 붉은 사과일 것이다.
또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이것도 마찬가지다.여기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귀천승속(貴賤僧俗)의 차별(差別)이 없다.

붉은 사과를 붉다 하고,해가 뜨면 밝고,해가 지면 어둡다는 데는만인(萬人)이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當然)하기 때문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異常)하다 하겠다.
당연(當然)한 사실(事實)을사실대로 본 것이 본심(本心)이다.당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데는
아무런 재주나 기교(技巧)가 필요(必要)치 않다.

재주나 기교를 부리게 되면도리어 사실을 비뚤게 보게 된다.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본 본심(本心)은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일체(一切) 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고,천진(天眞) 그대로 원래(元來)의 모습이다.
그런 자리에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이 붙어 있겠는가 ?
그래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思量分別)을놓아 버리면, 본심(本心)은 보기 싫어도 보아지는 것이다
이 본심(本心)은 끝없는 과거(過去)와 끝없는미래(未來)에 걸쳐 무한(無限)한 시간 속에단 한번도 생멸한 일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存在)요,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時間)과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공간(空間)과
그 속의 모든 생멸(生滅)은한 마음 속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본심(本心)에는생사(生死)니, 번뇌망상(煩惱妄想)이니 하는 것이붙어 있을 수가 없으나,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에,어느 쪽 하나라도 결(缺)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본심(本心)은영지(靈知)이면 그대로 공적(空寂)이요,공적이면 그대로 영지이니,공적과 영지가 둘이 아니다.공적과 영지를 둘로 보는 것은 영지가 되면 산란(散亂)하여 공적이 결(缺)하고,공적이 되면 혼침(昏沈)하여 영지가 결하여 온전하다 할 수 없다.수레의 양(兩)바퀴에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바로 나가지 못한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하나라야참된(眞) 영지요, 참된 공적이라 하겠다.참된 영지(靈知)는지식분별(知識分別)이 아니니 공적이요,참된 공적은 무기혼침(無記昏沈)이아니니 영지인 것이다.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 아닌 공적과 
영지가 원만(圓滿)한 마음이라야 심중(心中)의 혼침과 산란을 녹이고,양륜(兩輪)을 갖춘 수레와 같이똑바로 전진(前進)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열반(涅槃)의 언덕에 도달(到達)할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의 동(動)과 정(靜)에 있어서행주좌와(行住坐臥) 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공적과 영지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과 산란을 녹여 가는 것이 수도(修道)일 것이다.

초심자(初心者)는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쉬우니,동(動)과 정(靜)에 잘 조절(調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향(一向)에 동(動)해도 안되고,일향(一向)에 정(靜)해도 안될 것이다.
수도(修道)가 숙련(熟練)되고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일체(一切)무애(無碍)가 될 것이다.
공중(空中)의 새가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더라도 공중에 흔적(痕跡)이 남지 않듯이 !

- 지은이 지유(知有)스님 발행처 원효암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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