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대웅보전 불단
대웅보전 중앙 불탁(佛卓)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삼존불좌상으로 뒤쪽에 설치된
목조광배와 더불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의 경우, 상호(相好)가 원만하며,
이마와 머리 위의 두 곳에 있는 이중계주를 하고 있다.
또 목 아래는 형식적인 삼도가 있고, 옷 주름도 단정히 처리되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과 설법인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의 두 보살상
역시 전체적으로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다.
이 삼존상 뒤에는 각각 하나씩 목조 광배를 갖추고 있는데,
광배에는 당초, 연꽃, 불꽃무늬가 투각되었고
이 무늬들 사이사이에는 자그마한 화불들이 자리하고 있다.
【 불모(佛母)들의 혼(魂)과
흥선대원군의 필적(筆跡)이 남아있는 사찰, 흥국사(興國寺) 】
남양주 별내면 수락산 자락에 자리한 흥국사는 “덕절”로 더 많이 알려진 사찰입니다.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는 자신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왕의 아들이요,
왕의 아버지이면서도 왕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그 묘소만이라도 ‘릉(陵)’으로 불려지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민간에서만이라도 능으로 불려지게 계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것은 동대문 밖에서 궁중의 땔감을 마련하게 하고 땔감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묻되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다시 돌려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술과 음식으로 환대하며 땔감을 높은 값으로 사들였던 것입니다.
이후 소문은 빠르게 전해져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덕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흥덕사(興德寺)라 사액(賜額)한 이후
흥국사도 덕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은 임금이라도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듯 합니다.
이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흥국사는 근대기에는 경산화소(京山畵所)로 불리면서
수많은 화승(畵僧)들을 배출했던 도량이기도 했습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덕절(흥국사) 중은 불 때면서 불 막대기로 시왕초(十王草)를
그리고 화계(華溪寺) 중은 불 때면서 초할향(初喝香)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흥국사는 스님들이 힘든 생활 속에서도 신심으로 불화를 그렸던 곳입니다.
지금도 여러 전각을 둘러보면 많은 불화들이 봉안되어 있어
지극정성으로 불화를 그렸을 스님들의 혼이 느껴집니다.
흥국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활달한 글씨가 많다는 것입니다.
큰방에 걸린 “흥국사(興國寺)”편액, 만월보전 기둥에 걸린 주련,
영산전 기둥에 걸린 주련 등에서 흥선대원군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선조 임금의 효심으로 시작된 흥국사는 왕실의 원당으로,
불화를 조성하는 화승들의 교육도량으로,
기도영험이 많은 약사도량으로 이름이 쟁쟁한 사찰입니다.
[관람포인트]
1. 흥국사는 불화를 조성하는 화원들을 키워내던 도량이었습니다.
지금도 각 전각에는 많은 불화들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불화들을 꼼꼼히 살펴보세요.
2. 흥선대원군은 흥국사에 많은 글씨를 남겼습니다.
영산전, 만월보전, 큰방 등에서 흥선대원군의 글씨를 찾아보고 감상하세요.
3. 약사기도량인 흥국사에는 영험한 약사부처님이 만월보전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4. 덕릉마을 입구에는 흥국사가 “덕절”로 알려지게 한 덕흥대원군묘가 있습니다.
흥국사 대웅보전 주련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기사량
大道淸幽理更長 대도청유리갱장
但得五湖風月在 단득오호풍월재
春來依舊百花香 춘래의구백화향
허공경계를 어찌 생각해야 헤아릴 수 있으리
대도는 말고 그윽하여 이치가 더욱 심원하네.
다만 오호의 풍월을 얻을 수 있다면
봄이 오면 옛과 같이 백화가 향기로우리.
각 기둥에는 4개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經)』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야부송(冶父頌)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웅보전 북쪽 불단의 왼쪽에 봉안되어 있는 탱화이다.
화면 구성은 가운데 두 손으로 금륜(金輪)을 잡고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 아래쪽에 일광.월광보살이 역시 대칭적으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7여래.칠원성군.남극성.삼태 육성.28수(宿) 등을 가득히 배열했다.
여러 존상들의 모습이 도상에 충실한 만큼 색다른 느낌은 없으며,
그림의 구성력도 좋은편이다.
이 칠성탱은 1868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윤감(允鑑), 창전(彰殿), 두삼(斗三) 등의 화원이 조성한 것이다.
흥국사는 화승(畵僧)을 양성하던 사찰이다. 탱화가 많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북쪽 벽면에 걸려 있는 불법을 외호하는 신중을 그린 탱화이다.
화면은 상단 왼쪽에 합장하고 서있는 범천.제석을 비롯한 권속들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투구를 쓰고 무기를 든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권속들이 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특히 좌측에는 주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동자(奏樂童子)들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 신중탱은 1868년 금곡영환(金谷永煥), 경선응석(慶船應釋),
서익(瑞翊), 재근(在根), 춘만(春滿) 등의 화원이 조성한 것이다.
안에는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을 중심으로
지장탱, 신중탱, 칠성탱, 감로탱, 현왕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 입멸 후 법을 부촉(咐囑)받은 나반존자상과 나반존자가
천태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흥국사는 약사기도도량이기도 합니다.
현재 만월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좌상은 스스로 봉국사에서
흥국사로 가시겠다고 하여 옮겨왔다는 전설을 지닌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인지 기도를 올리면 영험이 많다고 합니다.
전각의 내부에는 정릉 봉국사에서 스님들의 투정에 화가 나 이곳으로 옮겨오셨다는
전설을 지닌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석조약사여래좌상 앞에 설치한 불탁(佛卓)에는 1861년(철종 12)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어 주목을 끌기도 한다.
만월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표면에 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어 얼굴 표정을 분명히 살피기는 어려운 편이다.
전체 높이가 120cm인데 몸 전체 크기에 비해 얼굴이 차지하는 몫이 크며,
무릎은 다소 약해 보인다.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이 된다.
만월보전은 시왕전 뒤쪽에 석축을 쌓아 한 단 높인 대지 위에 지어진 건물로서,
6각형의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1818년(순조 18)의 큰 화재 때 양로실과 함께
화재를 면했으므로 늦어도 1793년(정조 17)또는 그 이전의 건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찰 건물로서는 유례가 드문 6각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후불탱으로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화면은 가운데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한 6대보살 및 가섭과 아난 등의 4대 제자가 부처님 가까이 둘러 서있고,
사면 모서리에는 각각의 고유한 지물을 든 사천왕이 서 있다.
석가모니불과 보살들은 다소 정적인 모습이지만 사천왕과 제자들은 지물을 들거나,
혹은 부처님 말씀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여 손을 귀에
바짝 가까이 갖다대는 등의 변화 있는 동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도가 안정되어 있고 필선이나 채색에서도 큰 흠이 없는 우수한 작품이다.
1892년(고종 29)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엽(漢峰瑲曄),
경선응석(慶船應釋) 등의 화원이 조성하였다.
16나한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 받은 분들로
이들에 대한 신앙은 중국의 경우 당나라 중기 이후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져 조선시대 사원에서는
보통 응진전이나 영산전을 갖추어 16나한을 모시는 것이 상례이다.
흥국사 영산전 16나한상탱은 이러한 16나한을 그린 불화이다.
화면은 16나한을 1폭당 4위씩 배치해 전부 4폭에 나누어 그렸다.
각 나한은 깊은 산 속을 배경으로 해서 있는데,
어느 나한이나 다른 등장인물보다 월등 큰 모습에 선매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仙境이 깃든 짙은 청록색의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다소 명도가 낮지만,
동식물과 갖가지 화려한 문양들이 세심한 필선에 담겨 있다.
조성년대는 1892년이고, 경선응석(慶船應釋), 범화윤익(梵華潤益),
긍조(亘照), 창인(彰仁) 등의 화원이 그렸다.
兜率夜摩迎善逝 도솔야마영선서
須彌他化見如來 수미타화견여래
同時同回會如此 동시동회개여차
月印千江不可猜 월인천강불가시
도솔천과 야마천에서 부처님을 맞았는데
제석천과 타화천에서도 여래를 뵙네.
같은 시각 같은 모임, 다같이 이러하니
달이 천 강에 비치는 뜻 의심할 수 없어라.
흥선대원군의 필치로 된 주련이 걸려 있다.
내용은 『석문의범(釋門儀範)』「가사이운(袈裟移運)」가영(歌詠)에서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