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불을 모셨다.
결가부좌하여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석가여래는 전체적으로 매우 근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상호(相好)는 이목구비가 모두 단정하며, 눈은 반쯤 감은 이른바 행실형(杏實形)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무릎 옆으로 세웠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역시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석가여래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조금 작다.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이며, 2003년에 개금하였다.
대웅전 석가모니불좌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226호
시대 : 1700년 경
대웅전 약사여래불좌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226호
대웅전 아미타불좌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226호
시대 : 1651년
위치 : 대웅전
진여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큰 전통 한식 건물이 보입니다.
대웅전과 마주하는 곳에 한 칸 아래 누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법왕루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법의 왕 즉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요즘 사찰에서는 보통 많은 불자들이 모여 부처님 법석을 마련하는 자리로 설법전이라 이름 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주로 불전사물의 봉안 장소로 쓰여지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봉은사 법왕루는 대법회가 있을 경우 부족한 기도공간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97년 완공되었습니다.
法王樓
法王樓是在大雄殿對面下一間的樓閣.樓閣的機能有出入通路的作用,
是奉安佛前四物的場所及擧行大法會時準備行事的場所,可是奉恩寺的法王樓是以說法爲主,
有時候代替不足的祈禱空間使用.在1997年完成的
봉은사 대웅전 벽화 심우도, 부처님생애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카필라국의 왕비 마야부인은 흰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브라마 신이 나타나 중생 구제를 위해서 가르침을 펴기를 권했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전한다.
"여기 이자리에서 내 몸은 메말라 가죽과 뼈와 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갈등과 공포의 마구니를 내쫓고 깊은 명상에 들어 새벽녘 샛별이 반짝거릴 적에
드디어 보살은 모든 미혹의 번뇌를 일순간에 다 끊어버린 무상보리의 정각(正覺)을 얻게 되었다.
바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 말하는 '더 이상 위없는 올바른 깨우침'을 얻은 것이다.
태자 나이 35세 때 12월 8일의 일이었다
깨달음을 성취한 싯다르타는 그 순간 붓다, 즉 부처가 되었고,
그 후부터 뭇 생명의 구제자로서 존경받는 스승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던 장소는 지금도 붓다가야로 불리며,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리고 있다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며 길을 떠나 네란자라 강 근처의 우루벨라 마을에 이르렀다.
우루벨라의 숲에는 수많은 고행자들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새로운 수행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고행의 길. 그로부터 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싯다르타 태자의 나이 29세 때 사랑하는 가족과 태자로서의 부귀영화,
모근 것을 버리고 출가 수행의 길로 떠난다.
경전에서는 태자가 출가하던 때를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
환락이 충만했던 연회의 밤, 홀로 깨어난 싯다르타는 마부인 찬나와 함께
백마 칸타카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했던 그날은 4월 8일(음력)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 말했다고 전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곧 중생(衆生)이며,
모든 생명체들은 각기 보배로운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1982년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다포집 팔작지붕 건물로 중창하였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