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대(明代) 화가 정운붕(丁雲鵬)의 <육조상(六祖像)>
- 당나라 의봉(儀鳳) 원년 서기 676년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법사(印宗法師)가
열반경을 강해(講解)하고 있었다.
그 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조그만 언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一云風動)이라 하고, 어떤 이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一云幡動)이라고 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함께 강의를 듣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은 바람이나 깃발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오"(直以風幡非動 動自心耳) 하였다.
그 말에 놀란 인종이 그에게 불법을 청하면서 "소문에 홍인의 의발이 남쪽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혹시 그대가 전수자요?"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렇소" 하며 지니고 있던
의발을 꺼내 보였다.
모두들 크게 놀라 자리에 엎드려 그에게 문안을 올렸다. 이어 인종은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오히려 그의 제자가 된다. 의봉 원년(676) 정월 15일이다.
2월 8일에는 그가 지광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정식으로 불가제자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 남송(南宋) 화가 양해(梁楷)의 <육조작죽도(六祖斫竹圖)>
출가 수계를 기념하여 이해 불탄일에 법성사(法性寺)의 법재가 깎은 머리카락을 묻고
7층의 부도를 건립하니 이것이 예발탑이다. 이 때의 전후사정을 적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생전의 유일한 기록이자 현존 최고의 자료가 되는 ≪예발탑기≫이다.
이듬해 오래도록 은신했던 조계산 보림사로 돌아간 그는 그 후 76세로 입적할 때까지
36년 간 조계를 중심으로 전법(傳法)과 교화 활동을 폈쳤다. 그 유명한
6조 대감혜능(大鑑慧能)이다.
6조 혜능(慧能)에 의해 성립된 불교 선종(禪宗)을 흔히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신수(神秀)와 그의 계통을 북종선(北宗禪)이라 한다. 혜능이 양자강 이남에서,
신수(神秀)가 상대적으로 북쪽인 양자강 이북에서 각각 불법을 펼친 데 따른 가름이기도 하다.
북종선이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단계적 깨달음, 곧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데 반해,
남종선은 ≪금강경(金剛經)≫을 근거로 행동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강조한다.
그래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남종선이 혜능(慧能)으로부터 비롯되고, 북종선이 신수(神秀)로부터 연원하니
남능북수(南能北秀)라는 말도 만들어졌다.
후대에는 남종선(南宗禪)이 흥성하고 북종선(北宗禪)이
상대적으로 쇠미함에 따라 선종(禪宗)하면 으레 남종선(南宗禪)을 지칭하는 말로 통하고 있다.
혜능의 사상적 줄기는 후에 임제종(臨濟宗)·위앙종(?仰宗)·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등 '중국 선문오가(禪門五家)를 형성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임제종 계통이 유입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고 그 후
한국불교의 근간이 된다.
혜능이 양자강을 건너 기주 황매(黃梅)의 빙무산으로 5조 홍인(黃梅弘忍)대사를 찾아가
첫 대면한 것은 아직 20대 초의 나이였다.
대사가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람인데 나를 찾아왔으며, 여기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저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이제 멀리 와서 스님을 배알하는 것은 오직 부처가
되는 법을 구하려고 할 뿐입니다."
대사가 혜능을 질책하며 말했다.
"너는 영남사람이고, 또한 오랑캐이다.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가 일별(一瞥)에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좌우에 여러 사람이 있으므로 혜능을 대중 속에서 방아찧는 일을 하게 하였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은 전법할 시기가 됐다고 보고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송(偈頌)으로 지어 보라고 하였다.
누구든 참으로 깨달은 자에게 의발을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 근현대 중국화가 부유(溥儒)의 <六祖斫竹圖>
달마(達磨)가 중국에 왔을 때 모두들 그의 말을 믿지 않으니 증거의 규례로 의발(衣鉢)을 전하게 되었다.
자신의 한 팔을 잘라 달마에게 구도(求道)의 마음을 증명한 혜가(慧可)가 의발을 받아 제2조가 되었고,
이후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홍인의 수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신수(神秀)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밤중에 벽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몸은 곧 보리수요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惹塵埃
막사야진애
티끌이 없게 하라
이 게송을 발견한 홍인이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여 게송을 앞에 두고
향을 사르게 하니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중에 이 게송을 전해들은 혜능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강주(江州) 자사(刺史)의 보좌관(別駕)인 장일용(張日用)에게 부탁해 역시 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명경 또한 받침이 아니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일물도 없거늘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
모두들 혜능의 게송을 괴이하게 여겼다. 홍인도 보고서는 깨우침이 없으니 지워 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밤이 되자 홍인은 혜능을 조용히 불러 사흘밤낮을 이야기하며 혜능이
깨달음을 얻어 어떤 의심이나 막힘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의발(衣鉢)과 돈교법문(頓敎法門)을 전했다.
홍인은 제자들이 혜능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밤중에 남쪽으로 떠나보냈다.
제자들에게는 "의발은 이미 남으로 전했고, 능한 자가 얻었다"고 말했다.
'능한 자'가 혜능을 말함을 짐작한 제자들은 오랑캐에게 의발을 빼앗길 수 없다며 급히
혜능을 뒤쫓았다. 그러나 혜능이 이름을 감추고 강남에 은신하니 15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혜능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종법사의 열반경 강해 때였다.
는 그동안 조계산 보림사에서 신분을 감추고 은거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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