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팔정도(八正道) 생활하면 고통그물 벗어 납니다

qhrwk 2024. 12. 28. 10:45

 

 

[서암스님] 팔정도(八正道) 생활하면 고통그물 벗어 납니다

♣팔정도(八正道) 생활하면 고통그물 벗어 납니다♣

중생은 오욕락 때문에 자기도 남도 괴롭혀 - 행복은 바깥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행복은 자기 마음 속에서 찾아야지 바깥 경계에서 찾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디를 가도 괴롭고 우울하고 명랑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 바깥에 구름이 끼었다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깨치라는 것이지요. 자기 마음을 깨치면 모든 문제가 다 풀어지고 자기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모든 문제가 의혹 투성입니다. 

우리들의 괴로움은 보통 이 몸을 기준으로 해서 사는 토대에서 생깁니다. 

몸이 편안하고 몸이 만족하고 몸이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니 찌뿌둥하고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이 몸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뿌리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근본도 모르면서 몸이 움직이는 것에 따르다 보니 

괴로움이 생기지요.
결국 자신의 문제로 촛점이 돌아갑니다. 근본자기를 알아버리면 자기로 인해 나타나는 모든
현상계가 전부 다 자기가 뿌린 씨라는 것을 알게 되요.

자기를 깨치지 못하면 중간에 일어난 자기 형태만 흐리멍텅하게 알기 때문에 자기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같고 쓸데없이 피해를 입는 것 같지만 전부 자기가 뿌린 것이라 추호도 어긋남이
없다는 원리를 깨쳐야 되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는 항상 회의를 느끼지요.

그런데 깨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는 있지 않겠어요. 그것을 누가 던져 주었겠습니까.

자기가 느끼는 것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스스로 어떤 고민을 더하기도 하고 덜기도 합니다.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그것이 금방 없다 있다 있다 없다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흐리멍텅하다 이겁니다. 있으면 영원히 있고 없으면 영원히 없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기의 초점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고통의 원인을 모르기는 하지만 분명히 내가 받고 있고, 그 고통은 자기가 

뿌린 씨앗으로서 추호도 억울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억울함은 팔정도(八正道)를 행함으로써 없어지지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精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正定)의 팔정도는 모두
바른 행으로써 자기의 초점을 알아내는 수행이지요. 팔정도의 생활을 하면 자연히 내 마음이
밝아져 고통의 그물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하는 사제법(四諦法)이지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씹어 먹듯이 자꾸 부연해 이야기 하면 자기 문제에 깊이 파고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면 그 자기 자리에서 촛점이 되어 천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苦)도 사람의 모양처럼 짙은 고, 옅은 고가 있어 모양이 다 다릅니다. 

그 고를 느끼는 사람을 중생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은 흐리멍텅한 존재이지요. 흐리멍텅하기 때문에 고통도 천차만별로 느끼고

자기가 행복되게 산다고 하면서도 자꾸 불행한 구덩이로 기어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팔정도를 행해서 바르게 살 때, 삶의 이치가 순응해서 삶도 바르게 다가오는 것이고

자기의 어떠한 고통도 극복할 수 있고 피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급한데 언제 팔정도를 닦고 있느냐 뭐든지 갖다 쓰자 이겁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모르고 생활을 하다보면 결국은 인생이 부러지고 자기 파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원리를 이용해서 살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고기 덩어리 이 상태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 자리는 불생불멸합니다.
사람이 고기 덩어리인 이 몸은 죽어도 그 생명은 죽을 수 없습니다. 

이 육체라는 것은 그 자리만 떠나버리면 돌덩어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모양없는 그것이 자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모양이 없으니 죽을 수도 없고 또한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 자리는 우주 법계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자리입니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없어질 수도 없어요.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없어지고, 이 지구도 몇억년 지나면 마멸하여

없어지지요. 그러나 우리 생명자리는 모양이 없으니까 없어지지 않아요. 모양없는

그 자리가 바로 자기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죽어도 그 자리는 죽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밤에도 이 육체 는 쿨쿨 잠을 자도
그 자리는 꿈을 꾸며 돌아다니지요. 

방 안에 누워있는 자 기는 완전히 잊어버리지요.
그런데 몸을 방안에 놓고 마음만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잖아요. 꿈에도 분명히 몸은 가지고
다니잖아요. 누가 좋은 것 주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미친 개나 누가 칼들고 쫓아오면
도망가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사실 도망갈 필요도 없지요.

모양이 없는데 물릴 것도 없고 찔릴 것도 없잖아요. 그렇지만 분명히 도망간다 이겁니다.
깨어보면 속았지 요. 몸은 방안에 그대로 있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모양이 없는 그것이 자기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자기를 망각해 버리고 백년 안쪽으로 살아가는 이 육체를
자기인 줄 알고 온갖 향락을 다하는 오욕락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 히고 남도 괴롭힙니다.
육체를 근본으로 삼으니까 과거의 전생 다생한 영원한 자기 생명력을 보는 안목이 없어요.

그래서 이 육척단구의 몸이 자기 전체인 줄 알고 거기에만 매달리다가 나자빠지며 정신없어
하지요. 인도에는 갠지스강가에 피골이 상접한 사람일지라도 가만히 앉아 청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육체를 떠나 자기 생명력 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 앞에도 남을 해치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딱 앉아서 이 몸을 던져 쓰는 빛도 모양도 없는 자기 정신을 놓고 근본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수행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인도사람들은 육체를 본위로 살지 않고 인간의 진리를 본위로 살았기 때문에 육체가 무너지는
장면에도 헤매지 않고 당황하지 않지요.

이 몸이 자기가 아 닌 줄을 벌써 알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빛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년 인생을 목표로 사는게 아닙니다. 영원한 자기 생명을 갖고 나고 죽는 고통의
그물을 끊어버리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백년 사는 것도 바른 가르침으로 살 때 그 사람이 행복한 것이지 그걸 모르고 욕망에만
빠져 들어가면 그 사람은 백년 인생도 점점 비참한 인생에 떨어지게 되지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전부 생각의 흐름입니다. 생각, 그것을 가지고 살아갑니 다. 한 생각도
없을 때는 없습니다. 보통 중생의 세계에서는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내가 아무 생각도 안한다 해도 안한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는 것이므로 다 쉬어버리지 못한
것이고 텅 비웠다 해도 비웠다는 생 각 역시 하나의 생각이거든요.
결국은 우리의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생 각 속에서 자꾸 흐르고 있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좋은 경계가 오고 기뻐할 때는 좋은 줄은 알지만 그것은 금방 꿈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또 어떠한 생 각이 대신 밀어닥쳐 연신 붉은 생각, 푸른 생각, 흰 생각 온갖 생각이 난다
그 말이지요. 기쁜 생각 덤덤한 생각, 사랑하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질투하 는 생각, 온갖
생각이 자기의 부처를 가리고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니 괴로운 것이지요.
그걸 두고 불교에서 똘똘 뭉쳐 말하기를 ‘염기염멸이 즉 생사다(念起念滅 卽生死).’즉
생각 일으키고 생각 끊어지고 하는 그것이 나 고 죽는 것이라는 겁니다.

‘정’에 든다는 말은 무념(無念) 즉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생각이 없으면 돌덩어리나
나무뭉터기 마냥 아무 감각도 없이 허공같이 된다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 나 생각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는 생각으로 도저히 들어가지지를
않습니 다. 생각이 끊어지면 아무 생각이 없는 그런 무정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
흘러가는 그런 머트러운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머트러운 생각이 없을 때 내 본래 참으로 흐림이 없는 본바탕인 마음의 고향이 있고, 일어나는
생 각을 쉴 때는 본바탕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겁니다. 아주 생각이 없이 무슨 허공처럼
무정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상의 위대한 빛이 흐르고
아주 밝고 밝은 꺼지지 않는 참으로 불생불멸하 는 자기의 본바탕을 본다 그겁니다.

이렇듯 자기 마음만 깨쳐버리면 그만입 니다. 그 마음 깨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웃기면 웃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우리의 주인공은
누구도 평등해서 어 디서나 성불할 수 있습니다. 머리깍고 중이 되어 청정하게 계행을
지키고 절 에 있다고 해서 불교를 전매특허해서 무슨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설거사 같은 이를 보십시오. 

도반 셋이 가다가 어떤 여인하고 인연을 만나 서 마을에 들어앉아 농사짓고 아들 딸 낳고 

그렇게 살아도 먼저 도인이 되었 다는 겁니다. 

절에 간다고 꼭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법이 있지요. ‘이 뭣고’ 하는 법이 있습니다.

울고 웃고 온갖 행동하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누가 웃기면 웃고, 누가 부아 돋구면 성내고,
추운 줄 알고 온갖 것 판단하는 그 핵심이 도대체 어떻게 된 물건인가? 이 뭣고?
모든 활동을 하면서도 불교를 뚫어 내고 마음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생활불교지요.

종일 일을 하여 피곤하다 해도 세수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시간 작정해 서 그동안 내가
잠은 덜 자지만 내 인생문제를 한번 풀어보자 마음먹고 딱 앉아서 ‘이 뭣고’를 붙잡고 화두를
한다 그겁니다. 

그런데 망상에 덮여 잠 못이루고 뒤척이다보면 이 눔의 신경이 항상 활동을 하니까 신경이

피로해 질 수밖에요.

여덟 시간 아홉 시간 자도 항상 찌뿌듯한 게 잠이 맨날 부족하 지요. 

그런데 화두를 하고 자면 한 시간 두 시간 자다 일어나도 눈이 샛별 같고 아주

총명해진다 그겁니다.
그런데 이런 보배를 안하거든요. 자기 전에 한 시간 이나 두 시간이나 세수하고 다부지게
앉아서 ‘이 뭣고’를 하는 겁니다. ‘이 뭣고’를 하는 그 시간만큼은 순전히 내 시간이다 이겁니다.
한 시간이고 얼마고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하루 살아가는데 마음 의 여유가 생기고 누가 부아를 질러도 거기에 말려

들어가지 않아요.

늘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 공부를 안한 사람은 조금만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파르르하고 성을 내고, 서로 싸우고
친구간에도 의를 바꾸고, 부아가 되게 나면 아들딸 낳고 살아가는 부부간에도 우리 그만
갈라지자 이렇 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조그만 데 걸려가지고 아귀다툼하고 삽니다.

조금만 이 마음의 근본자리를 공부해 놓으면 누가 욕을 해도 허허 웃고 ‘아, 저 사람은 살아가는 

세계가 저렇게 좁구나, 나도 공부하기 전에는 누가 뭐라 하면 거기에 끄달렸지’ 하 고 오히려
동정이 가고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요.
그만 큼 자기 인생관의 폭이 넓어집니다. 내 마음자리가 본시 위대한데 천하도 다 집어삼킬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진 마음을 조그맣게 쓰기 때문에 항상 불행 속에 빠지는 겁니다.

화두를 하면 우리가 넓은 마음을 넓게 쓰는 그런 공부 가 저절로 됩니다. 그래서 ‘이 뭣고’를
하는 거지요. 항상 처음에는 잘 안됩니다. 그런데 안되는 게 되는 겁니다. 아예 공부를 안 하면
안되는 것도 없습니다.

 ‘아이고 나는 망상이 일어나서 도무지 안된 다’고 해도 그게 되는 겁니다.
비교하면 자전거를 타는데 첫번에 타는 사람치고 잘 타는 사람은은 없습니다. 

나자빠지고 넘어지면서 어떤 때는핸들도 부러뜨리고, 팔도 다 치고, 무릎팍도 깨지고 그럽니다.

그런데 안된다고 집어던지면 평생 그 사람 자전거 못타는 겁니다.

첫번이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자꾸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우리 가 온갖 일을 해 가면서도 화두를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서 공부 하는 쪽에 비중이 커지게 되면 이 세상살이에 모두 구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익어가기 마련입니다.

뭐든지 일심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뭐든지 열심히 한 가지로 하면 뚫어지는 구멍은
마찬가집니다. 참선하는 이나 염불하는 이 나 기도하는 이나 뭘하는 이나 일념으로
들어가면 뚫고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망상이란 구름을 헤치고 일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출처 :매사와법진 원문보기▶ 글쓴이 : 法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