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우학스님의 무문관] 제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 생사대사 해결도 ‘조고각하’서 비롯

qhrwk 2024. 1. 2. 08:20

 

‘생사대사’ 해결도 ‘조고각하’서 비롯
제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가) 본칙(本則)
 
조주 큰스님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저는 이제 막 총림에 들어왔습니다. 

부디 큰 스님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먹었습니다.” 

큰스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그럼, 발우는 씻었는가?” 

이 말씀에 찾아온 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 평창(評唱) 및 송(頌)
 
무문스님이 평하여 말하였다.
조주 큰스님은 입을 열어 쓸개를 내보이고 심장과 간까지 밖으로 드러내었다. 

그런데도 저 스님은 진짜 사실은 알아듣지 못하고, 종을 항아리라고 하고 있다.
 
무문스님이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도리어 알아듣는 데 더디다.

일찌감치 등불이 곧 불인 줄 알았다면

밥 지은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을.
 
일상생활 잘 하는 사람이 진실한 ‘깨달음의 구현자’
 
(다) 설명
 
조주록(趙州錄)에 실린 이야기이다.
 
조주스님이 처음 남전보원(南泉普願) 대선사(大禪師)를 찾아갔다. 

그때 남전 대선사는 방장실에 누워서 쉬고 있었는데 조주스님이 오자 불쑥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는가?” 

조주스님은 답했다.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남전대선사가 다시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는가?”라고 묻자 

조주스님은 “서상은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여래는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 대선사는 벌떡 일어나서

 “그대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라고 물었다.

 이에 조주스님은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 대선사는 또 “주인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조주스님은 몸을 굽히며 “동짓달은 매우 춥습니다. 바라옵건데 큰스님께서는 기거하심에

 존체(尊體)만복하십시오”라고 답했다.
 
남전 대선사는 기특하게 생각하고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두 분의 대화는 애초부터 어렵지도 않거니와 다분히 현실적이다. 

오가는 문답(問答)이 곱씹을수록 재미가 난다. 

여기서 소개되는 ‘조주세발’의 화두 또한 조주 큰스님이 남전 대선사를 처음 뵈었을 때의 

대화처럼 할(喝)을 한다거나 방(棒)을 휘두르는 과격함이 전혀 없이 일상 언어 속에서 

조용한 깨우침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일용이부지(日用而不知)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의 일상사(日常事)가 도행(道行)아님이 

없을 때 살아있는 공부인(工夫人)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의 해결도 결국은 조고각하(照顧脚下)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의 모든 일을 마음으로 자각하고 생활 가운데 자기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진리,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말들이 굳이 소용없다.
 
저 금강경의 서분(序分)에서 보이는 내용도 이런 점에서 재미있다. 부처님의 극히 일상적 

행위에 대해서 수보리가 찬탄해마지않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어떠한 진리나 도(道)도 일상성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금강경은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성공안(現成公案)이란 말이 있듯이‘지금 바로’, ‘여기 이곳’에서 자기의 일상생활을 잘 

펼쳐나가는 사람이 진실한 깨달음의 구현자이다.
공양을 하였으면 발우를 씻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가!
 
우학스님 /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무일선원 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