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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 해설(解說)- 제17강 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연구

qhrwk 2025. 2. 17. 07:29

 

 

화엄경(華嚴經) 해설(解說)-  제17강 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연구

이제부터는 중국과 한국에서 체계화된 화엄사상을 그 교사부분과 함께 살펴보자.

우선《화엄경》의 중국 전래와 화엄경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화엄경의 전래와 번역

《화엄경》의 편찬과《화엄경》을 소의로 한 교학적 체계의 성립과는 사뭇 다르다.

《화엄경》은 인도에서 이루어졌으나 화엄교학은 중국과 한국 등에서 체계화되었으니,

곧 화엄종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처음 중국의 화엄교학 형성에 기반이 되었던 것은《육십화엄》이다.

이《육십화엄》의 범본을 중국에 전래한 이는 월지국의 지법령이다. 그는 우전에서

3만 6천게의 범본을 구하여 장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법령은 계빈국 삼장 불타발타라〔覺賢〕를 만나《화엄경》을 중국말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가 처음 장안에 도착했을 때 구마라집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와 대립이 생겨 여산에 있는 혜원의 처소로 갔다.

그곳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가 412년에 하산하여 형주로 갔다. 건강의 도량사에

있었을 때 번역 요청을 받아 418년에《육십화엄》의 번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불타발타라는 경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선과 율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전한다.

이《육십화엄》의 번역장에서 받아적는 필수를 맡았던 분으로 법업(法業)이 있다.

법업은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화엄경》을 이해한 자라고 전해진다.

《화엄경전기》에서 법장은 "화엄대교의 출발은 법업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법업은《화엄경지귀》2권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있어서《화엄경》의 강포는《육십화엄》의 역장에 참예한 동진의 법업으로 효시를 삼는다. 그 이래 화엄의 강포에 참예한 자가 많았다. 불타발타라 이후도 그 이전처럼 화엄의 별행경이 많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역시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경으로서《팔십화엄》과《사십화엄》의 번역이 주목된다.

《팔십화엄》의 전역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화엄경》의 범본이 우전국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측천무후가 칙령을 내려 사신을 보내어 십만게송의 범본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리고 실차난타(實叉難陀)로 하여금 대변공사(大遍空寺)에서 번역하게 하였으니 695년이었다. 4년에 걸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때 측천무후가 서문과 품의 제목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서문은《팔십화엄》과 함께《신수대장경》10권의 첫페이지에 수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팔십화엄》번역장에서 법업이 필수를 맡았다.

《사십화엄》의 번역은 이로부터 96년 뒤에 계빈국 삼장 반야에 의해 번역되었다.《육십화엄》이 번역된 지 278년 뒤에《팔십화엄》이 번역되었으니,《육십화엄》이 번역된 때부터 헤아린다면 374년 뒤이다. 남인도 오다국왕이《화엄경》범본을 당나라 조정에 보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필수를 맡은 분은 원조(圓照)이며 청량징관도 역장에 참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화엄경》의 번역 외에 중국 화엄교학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십지경론》의 번역을 빠뜨릴 수 없다. 이《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 화엄을 원교로 내세운 지론종이 성립되고 지론종의 혜광(惠光)을 거쳐 두순 → 지엄 → 법장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고 화엄교학이 체계화된 것이다.

2. 중국 화엄종의 성립

(1) 중국 화엄오조설

중국 화엄종조로는 전통적으로 법순두순(法順杜順, 557~640)→ 지상지엄(至相智儼, 602~668) →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 →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 →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로 이어지는 화엄오조설이 있다.

화엄종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징관의《화엄경소》에서였다. 그리고 화엄조사설은 종밀의《주법계관문》에서 처음 세우고 있다. 그러나 화엄종의 대성자 법장이 그의《화엄경전기》에서 이미 그 기초는 다져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이 두순초조설 외에 지엄초조설 또는 지정초조설이 거론되고도 있다. 지엄이《화엄경》을 배운 스승은 지정(智正, 559~639)이라는 점과 두순의 화엄관계 저술이 진찬이 아니라는 의문 때문이다. 아무튼 법장이 화엄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법장대에 이르러 화엄종이 대성되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2) 화엄칠조설

중국 화엄종도 그 연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중국 화엄오조에다 마명과 용수보살을 모셔서 화엄칠조설을 신봉해왔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용수는《화엄경》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화엄경》의 별행경인《십지경》을 주석한《십주비바사론》을 짓기도 했다. 마명을 모신 것은 마명을《대승기신론》의 저자로 보았던 것이니,《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은 중국에서 이룬 법계연기의 기초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 화엄종에서는 마명과 용수, 그리고 중국의 화엄오조를 합해서 칠조를 내세운 것이다.

(3) 화엄십조설

칠조에다 세친보살과 문수와 보현보살을 합해 화엄십조설을 말하기도 한다. 세친은《십지경》에 의거하여《십지경론》을 지었으니, 화엄교학의 성립과 발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다른 세 보살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두 보살은《화엄경》에 출현하시는 양대보살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 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 두 분은 경전상의 이상적인 보살마하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말한다면 지엄 다음에는 의상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설도 있다. 법장은 스승인 지엄의 입적시까지 거사로 있었으며 의상보다 20년 정도 연하이다. 그런데 의상은 귀국하여 한국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으므로 중국 화엄종은 법장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본다.

3. 화엄종 성립의 배경

지엄은 12세 때 두순을 따라가 달법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계속 두순의 인도를 받았음이《화엄경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화엄경》을 배운 것은 같은 지상사(至相寺)에 기거했던 지정으로부터였다. 지정은 혜광(惠光) → 도빙(道憑) → 영유(靈裕) → 정연(靜淵)으로 계승되는 지론종(地論宗) 남도(南道)파에 속했다. 법장 역시 지론종 남도파의 사상적 영향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화엄종의 성립을 살핌에 있어 지엄․법장과 관련 있는 당시의 종파상황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법장 당시 유심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름에 따라 여러 종파가 형성되었다.《화엄경》의 유심설에 바탕을 둔 세친의 유식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십지경론》의 번역에 의해서이다. 즉, 보리유지와 륵나마제 등이 세친의《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의해 지론종이 일어났다. 진제가 무착의《섭대승론》을 번역하여 섭론종이 흥기하였으며, 이어서 현장이 호법 등의《성유식론》을 번역함에 의해 자은법상종이 형성되었다.

지론종은 남도와 북도의 2파가 있으니《십지경론》을 번역함에 있어서 륵나마제는 정식설〔法性生一切法〕의 입장을 취했는데 혜광에 의하여 남도파로 형성되었다. 보리유지는 망식설〔黎耶生一切法〕을 주장하였는데 도총에 의하여 북도파로 계승되었다.

남․북도라 함은《속고승전》에서 낙양 아래에 남북으로 난 두 길이 있었는데 도총은 북도에서 4인을, 혜광은 남도에서 도빙 등 10인을 지도하였다는 데서 보인다.

그런데 후에 지론종 북도는 같은 뢰야망심을 주장하면서도 제9 무구식(無垢識)을 설정한 섭론종에 흡수되고 섭론종은 다시 법상종과 합해진다.

반면 지론종 남도계는 혜광 문하가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 아래 도빙(道憑)․담준(曇遵)․법상(法上)이 유명하다. 담준의 제자에 담천이 있어 법상종을 세우고, 법상 문하에 정영사 혜원(523~592)이 있었다. 혜원은《대승의장》을 편찬하였으며, 이 혜원의 사상 또한 화엄종의 교학체계가 형성됨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되었다. 도빙의 제자에 정연이 있고 정연의 뒤를 이은 지정대에 이르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엄종의 지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지엄과 법장 당시는 제가들이 심(心)의 분류 및 아뢰야식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였다. 망식설과 정식설은 뢰야연기와 진여연기의 대립을 야기시켰으니 이는 당시의 어려운 문제였다. 법장은 이러한 대승연기설을 종합하고 통일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스승인 지엄과 동시대인으로서 교세를 떨치고 있었던 현장의 법상종 사상을 초극할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법장은 초월적 입장에 있는 법상 유식설에서 자료를 가져와, 이를 지론 남도의 정식설과 기신론의 진여수연설에 근거하여 공의 원리로 대립을 화해시켰다. 즉, 법장이 법계연기사상을 확립하는 데 있어 진여사상에 앉아 유식가에서 자료를 섭취하여 공의 논리에 의해 구성 변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화엄종의 유심설은《화엄경》을 소의로 하면서도 융성하였던 당시 중국불교의 유심사상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체계화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법장의 체계는 그의 스승인 지엄의 시도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서 별교일승 법계연기설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법장을 위시한 화엄종의 이러한 입장은 화엄교판에서도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화엄종의 성립이 같은 유심적 측면을 중시한 다른 종파와는 그 성립시기에 있어서 크게 다름을 보게 된다. 화엄종은 소의경전인《화엄경》의 번역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육십화엄》이 5세기 초에 번역되었는데 7세기의 지엄이나 법장 때에 와서야 교리가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의 전적이 번역되면서 바로 종파가 형성되었던 타 종파들과는 크게 다르다. 유심을 핵심으로 한 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종파들이 소의 논서의 번역이 이루어지자마자 형성되는 데 비해, 화엄종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종파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화엄종이《화엄경》자체를 소의로 한 데 비해 다른 종파는 경의 주석서가 번역된 것에 크게 힘입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엄종의 성립이 다른 종파에 비해 그처럼 시간적인 격차가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화엄종조로 모셔진 분 외에《화엄경》과 인연이 닿았던 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화엄경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화엄경》의 세계를 사상적으로 체계화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