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네 가지 길
누구나 한번 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업보윤회설(業報輪廻說)이다.
우리의 생명은 창조에서 종말로 가는 일회성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겁(永劫)에
걸쳐 끊임없이 탄생과 소멸을 거듭한다는 것이 윤회설이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의 삶은 우연적 사건이나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業]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업보설이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중생의 행위와 윤회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하셨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바사익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묻기를 “브라만 종족은 항상 브라만의 집안에 태어나고,
왕족은 항상 왕족의 집안에 태어납니까?”라고 물었다.
왕의 물음에는 이생에서 이룩한 삶의 조건들이 내생에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욕망이 배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왕이 기대하는 것과 달랐다.
부처님은 중생의 삶은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된다고 하셨다.
“첫째는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둘째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셋째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넷째는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첫째,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먼저 어두운 곳이란 하천하고 빈궁한 곳에 태어나거나 귀먹고 눈멀며 벙어리와 같이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노예와 같이 비참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나쁜 업을 더 짓는다면 이생에서 받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뒤에 다시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삶은 마치“뒷간에서 나와 다시 다른 뒷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둘째,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비록 현세에는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이 불행한 삶을 살지만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착한 업을 닦는다면 목숨이 다한 후에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땅에서 일어나 평상에 오르고, 평상에서 일어나 수레에 오르며, 수레에서
일어나 말에 오르고, 말에서 일어나 코끼리에 오르며, 코끼리에서 일어나 궁전에 오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셋째,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현세에는 행복하게 살지만 내세에는 불행해지는 삶을 말한다.
왕족의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며, 창고에는 재물과 보물이 가득 차 있고, 외모는
단정하고 위엄 있는 것이 밝은 곳의 삶이다.
하지만 현생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생의 행복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비록 현생에 행복한 삶을 살더라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나쁜 업을 짓는다면 그도
예외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는다.
이런 삶은 “마치 궁전에서 내려와 코끼리 위에 떨어지고, 코끼리에서 내려와 말에 오르고,
말에서 내려와 수레에 오르고, 수레에서 내려와 평상에 앉고, 평상에서 내려와 땅에 떨어지고,
땅에서 떨어져 똥구덩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삶이므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넷째,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밝은 곳이란 왕족이나 풍족한 집에 태어나 재물과 보물이 한량없으며, 몸이 건강하고 얼굴이
단정하여 위엄 있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사람이 여기에 안주 하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선업(善業)을 행한다면 목숨을
마친 후에도 천상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삶은 마치
“이 궁전에서 저 궁전으로 가고, 코끼리에서 코끼리로 옮겨 타고, 말에서 말로 가고, 수레에서
수레로 가며, 평상에서 평상으로 가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라고 한다.
태란습화(胎卵濕化)로 태어나는 생명의 종류가 무수하고 그들이 짓는 업이 다양하므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윤회의 길도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수한 생명들이 받게 되는 수많은 윤회의 길도 크게 보면 이상과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중요한 것은 이상과 같은 네가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스스로 짓는 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연이나 운명도 없으며,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도 개입되지 않는다.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짓는 것이며, 내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欲知前生事 지금 받고 있는 삶을 보고,欲知前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欲知來生事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행위를 보라 今生作者是”고 했다.
물론 부처님은 밝은 곳에 대해 ‘좋은 신분’, ‘경제적 풍족함’, ‘건강한 육신과 아름다운 외모'
등으로 설명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들의 근기에 맞춘 설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참다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우리들은 이미 밝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눈부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번뇌와 집착으로 인해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이생은 어두운 곳이며, 무명(無明)에
덮여 방황할 때 내생도 어두운 곳이 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진리를 깨달아
무명에서 벗어나면 우리들은 이미 밝은 곳에 있다.
그런 자각 속에 선업(善業)을 행할 때 우리들의 미래도 밝은 곳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불자의 삶이란 바른 진리를 깨달아 지금 이 순간이 밝고 행복한 삶임을 자각하고,
끊임없는 정진으로 찬란히 빛나는 미래로 가는 여정이다.
그것이 바로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불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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