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걷고 줍는 스님, 마지막 길을 나서다 3.

qhrwk 2025. 1. 15. 07:28

 

♣걷고 줍는 스님, 마지막 길을 나서다 3.♣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방산까지 도착할 즈음이 되니 어느덧 

해는 서쪽 산 아래로 넘어가고, 도착하기 직전부터 한방울 두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우리 지역의 불자분들이 모처럼 이 지역을 지나시는 스님을 뵙겠노라고 몇몇 분께서 모이셨다.

저녁 공양을 나누며 스님께 좋은 말씀을 듣고 내일은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 함께 나와 함께 

걸으면서 길가의 쓰레기를 좀 함께 줍기로 했다. 

스님의 걷기와 환경, 자연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걷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비우는 

것이며, 자기 성찰이자 곧 자연과의 대화라는 말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신도님들이 함께 모여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10장을 구입하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청정지역 양구, 그리고도 더 깊은 산골 마을 방산에서 죽곡리에 이르기까지의 길. 

이 청정한 곳에 무슨 쓰레기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모두들 별로 주워야 할 쓰레기는 없을 

것이라고 슬슬 걸으며 이야기나 나눠야지 했던 마음은 몇 걸음 걷지 않아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차로 다닐 때는 깨끗해 보이던 곳들이 걸으면서 또 눈과 마음을 쓰레기에 집중하며 응시하고 

걸으니 곳곳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널려 있는지. 청정한 지역 이 곳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우리나라의 다른 길들은 말 다 한 것 아닌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그동안 '쓰레기'라는 것은 별로 생각지 못하고 살았다.

쓰레기를 줍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내 눈 앞에 있던 없던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갈 뿐이었고, 당연
내 눈에 쓰레기는 없었던 것이다. 
쓰레기를 줍겠다는 그 생각으로 큼직한 쓰레기 봉투를 하나씩 집어 들고 걷는데 내 눈 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그동안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주 지저분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건 참 의외이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한 그러나 아주 귀한 경험이다. 
처음 우리 모두는 100리터짜리 큰 쓰레기 봉투를 한두장 정도 채울 수 있을 정도겠지 길가에 
얼마나 쓰레기가 있겠느냐고 반신반의를 했었지만 출발하여 두세시간 정도가 되었나 싶은 
시간동안 100리터 쓰레기 봉투 10개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랐으니 말이다.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때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보면 주워야 한다고 도덕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 수업이 있고 난 뒤에 무슨 깨달음이 있었나는 모르겠지만 몇 일을 

등하교길에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서 버리면서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하던  그런 기억이 

희뿌옇게 뇌리를 스쳤다. 아마도 그 때가 '쓰레기'를 보면 주워야 한다는 그 기본적인 생각의 

씨앗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던 유일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내 대지와 길 위의 밭은 무성한 잡풀들과 그야말로 쓰레기같은
부주의만 키워왔지 않나 싶다. 
내가 지나오면서 길이 깨끗해지는 것은 분명 아주 단순하지만 전혀 새로운 경험이자 전환이다. 
아, 쓰레기를 줍는 즐거움 이 단순함이 이 세상을 우리 주위를 또 내 마음을 얼마나 청정하게 
가꾸어 줄 수 있는가. 
그러고 보면 스님의 걷기와 쓰레기 줍기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의 두 가지 서원을 실천하는
스님만의 독특한 수행방법이 아닐까 싶다.

걷는 내적인 경행수행과 매일같이 쓰레기를 주우시는 이타적인 자비행이 얼마나
소박하면서도 평범하면서도 획기적이며 경이로운 방식의 보살행인가. 

입으로는 수행이 어떻고, 보시가 어떻고, 복과 지혜의 실천이 어떻고 누누이 떠들어 대지만 

그런 가운데 자기 욕심을 채우며, 스스로 수행자라는 아상을 키워가며, 작은 수행도, 

작은 하심도, 작은 나눔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수행자들을 볼 때 이름도 없고, 

무슨 직책도 없고, 무슨 큰 절의 소임도 없으며, 환경운동이 어떻고, 수행이 어떻고 크게 나서서 

소리치지도 않으시지만 그저 묵묵히 온몸으로 내 앞의 휴지를 주우며 걷는 지금 내 앞의 

이 스님이야말로 얼마나 자기다운 수행과 자비의 길을 걷고 있는가. 

이 얼마나 삶을 세상과 일터의 중생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생생하게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실천하고 있는가.

선지식이 가만히 오래 앉아 있는다고 다가 아니고,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쓴다고
다가 아니고, 무슨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다가 아니고, 무슨 큰 일을, 무슨 큰 법회나 이벤트를, 

무슨 큰 절에서 크게 크게 한다고 그게 다가 아니다. 

자신이 있을 자리에서, 자연과 아주 가까운 그 자리에서,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자연과 환경과 

수행과 그리고 중생들의 삶의 터전을 소박한 발걸음으로 걸으면서 뭘 한다 만다 하는 상도 없이 

당신의 몫을 묵묵히 해 나가시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수행자다운 깨어있는 

수행자 정신이 아니겠는가.

그래, 수행자 정신. 수행자가 수행자 정신을 잃으면 그건 수행자 옷을 입고 있어도, 수행자 

대접을 받고 있어도, 목탁을 치고, 법회를 열고, 좌복 위에 몇 날을 앉아 있어도 그건 더이상 

수행자일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 정신, 그것은 매 순간 순간의 현재를 온전히 살아나가는 깨어있는 반야의 정신이고, 

거추장스럽게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와 가난의 정신이며, 내가 해야 할 나눔의 

몫을 늘 실천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베풀고 봉사하는 보시의 

정신일 것이다.
수행자가 지혜와 보시와 가난의 정신을 잃으면 그것은 더이상 수행자가 아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스님들이 사회에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스스로 나눔을 실천하며 스스로 

깨어있는 정신을 닦고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지, 비싼 차에, 비싼 옷에,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가난의 정신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스로 스님을 무슨 높은 위치인 것으로 여겨 신도님들이 

떠받들어 주는 것에  안주하고, 당연한 삶의 방식인 기도와 수행과 예불과 정진을 게을리

한다면 당장에 부끄러운 법복을 벗어버려야 하리라.

이른 아침 엊저녁 공양 때 밥 한 공기를 추가로 더 시키셨다가 그 밥 한 공기에 김치 몇 조각을 

방으로 들고 올라 가셔서는 아침 공양을 그걸로 굳이 때우고 마시겠다시며 든든하게 밥 잘 먹고 

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또 길 위에 올라 발길을 옮기셨다.
스님의 뒷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어쩌면 그리도 당당하고 아름다운지. 뒷 모습에 합장하고 삼배를 드렸다.